내가 예수를 주(主,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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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글은 논리적인 글이 아닌 개인의 체험입니다.

어린시절
  만 28세 어느덧 서른이 다되가는 이 시점에 나의 삶을 되돌아보면 크게 기억되는 것은 역시 예수님이 함께해주신 흔적 들이다. 모태신앙으로 아주 어려서부터 찬송가를 입에 달고 산 나였으며 어린 나이임에도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라고 시인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기 쉽다. 부모가 주는 것은 그저 이것을 먹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 생각 할 뿐이다.  어린아이의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나름대로의 판단 기준과 좋고 싫음이 있지만 결국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영향이 매우 크다. 나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부모님 또한 오랜 믿음을 가지고 계셨으며 당시 조부모 께선 장로, 권사님이셨다.(지금은... 시골교회의 원로 장로님과 권사님이시다.) 그 영향이 무척이나 크게 작용하였다.

  하지만 어린 나이임에도 분명 나 스스로 선택하였다. 왜냐하면 종교, 신앙, 믿음에 관한 생각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나의 커다란 고민거리 하나는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될까?" 였다. 지옥에 갈까? 천국에 갈까? 아니면 불교에서 처럼 윤회를 하게 될까? 아니면 그냥 죽으면 끝인걸까? 이런 고민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물론 교회에서 천국과 지옥이 있으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천국에 간다는 막연한 지식이 있었으나 어린나이임에도 그냥 믿는 것이 아닌 스스로 무언가 판단해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내 판단에 의하면 정녕 예수님은 우리 가족에겐, 더 작게는 나에게는 주님 이셨기 때문이다.
  작은 시골의 단칸방에서 힘겹게 살때 위로가 되었으며, 할아버지께서 크게 아프실 때(허리 디스크) 마다 기적적으로 낫게 하셨으며, 내 팔이 부러져 아플때 낫게 하셨으며,  이웃이 아플때에 아버지의 기도로 낫게 하시고 (당시 기도하던중에 아버지는 안수하시던 손등에만 땀이 흥건하셨다.)부모님께 혼나고 맘 아플때에도 작은것 하나하나에도 응답해 주셨기 때문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내 믿음은 점점 확고해져갔다. 그 뒤로 나는 주님께서 나와 동행함을 느끼며 매일매일 주님과 데이트 하듯 하나하나 물어보고 대화하듯 지냈다.

  할아버지께서 나의 누이에게 "기도했으니깐 00일은 잘될거야" 라고 말했을때 내가 이렇게 말했다 한다.

"에이~ 할아버지 믿음을 가지고 얘기 하셔야죠~ 잘 될거야 가아니라 잘된다라고 해야죠"

  그때는 뭘믿고 할아버지 앞에서 나대었는지 지금 생각하면 쪽팔리지만 여튼 나의 믿음은 견고했다. 


믿음은 고난 가운데 성장한다
  사람이 시련과 고난 가운데 극복하는 힘을 기르게 되고 또 시련을 견디고 나면 그리 큰일이 아니었음을 느낀다. 믿음 또한 그렇다 많은 유혹과 시련가운데서 성장하기 마련이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부터 나에게도 유혹의 손길이 다가왔다. 6학년 새학기가 시작된뒤 오락실 게임에 빠져 한주, 두주 교회를 나가지 않게 되었다. 결국 나중에는 하루이틀 빠진것이 다시나가기가 미안한 맘이 들어서 거의 1년간 교회를 나가지 않았다. 그러다가 다시금 마음을 잡고 중학교 때 부터 신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나는 많이 변했다. 그간 조부모와 부모님, 그리고 주일학교 선생님들을 통해 배웠던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성령님이 나에게 너무나 갈급하게 다가왔다. 이대로의 신앙으로는 살아갈 수 없을것 같은 느낌에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무엇 그 이상의 것이 있음을 나는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1학년 때 부터 고등학교 3학년 때 까지 정식 예배 뿐 아니라 기도모임까지 빠지지 않았다. 기도모임이 없어지자 임원을 맡아 다시 만들어서 까지 기도하며 성령을 구했다. 그러던 중 임원을 마치고 공부에 전념해야할 고3시절 내 인생의 피크 타임이었다. 아니 전환점이라는 표현이 보다 적절하겠다. 고3 새학기가 시작된뒤 2~3주 뒤 주일 오후 교회의 작은방 한켠에서 마련된 기도모임에 참석한 나는 성령을 체험했다. 머리속을 헤집고 스쳐가는 과거의 수많은 생각들과 죄악들... 모두 회개 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때 내 입에서는 성경에서 "방언"이라 표현하는 성령님의 은사중 하나가 터져나왔다. 방언의 은사가 자랑만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숨길 것도 아님을 나는 잘안다. 나는 현재까지도 방언의 은사를 통해 위로 받기도 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그 후 나의 신앙은 더욱 뜨거워져 고3시절 동안 새벽2시에 자고 4시반에 일어나 새벽예배를 드린뒤 등교를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를 떠올리면 길을 걷는동안 하나님과 대화하기에 바빴다. 소소한 일상에서 부터 작은 생각들 까지... 그리고 가끔 대화할게 없을 때는 직접 음율을 짓고 가사를 붙여 찬양을 부르며 걷기까지 했다. 지금 생각해 보아도 그리운 시절이며 이때의 뜨거움으로 하나님을 대하고 싶다. 하지만 모든 부부가 뜨거운 사랑만으로 평생을 살 수 없듯이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뜨거운 감정만으로 신앙생활을 평생 할 수는 없다.

실패의 연속
  군대에서 나의 신앙은 점검을 받게 되었다. 물론 내가 처한 자리는 나에게 있어 최적의 자리였다. 힘든 육군 포병으로 똥포를 끌고 다니는 전포 생활을 1년 그후 사격지휘병으로 1년을 생활 하였으며 그 군생활 중 교회에서 찬양팀으로 서게 되었다. 하지만 찬양팀 생활이 내게 은혜로운 시간이었음에도 반면에 다시 나를 점검하는 시간이 되기도 하였다. 찬양팀을 리드하고 있는 나는 은혜 받고 있는데... 앉아있는 사람들은 달랐다. 지금 되돌아 보면 알것 같다. 왜 그랬는지.... 나는 내 삶으로 진정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대 내에서 나는... 남들이 보기에 "일 못하는 후임", "만만한 선임"이 었던것이다. 부대내의 생활을 보다 충실히 했어야 했다... 여튼... 이러한 생활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 같아 요즘도 많이 힘들다. 내가 무엇을 잘못해오고 있는지... 주위 사람들로 부터 인정받기가 너무 힘들다. 인정 받는것에 집착하는 것도 좋지 않지만 그간 매번 실패만 해온 탓인지 신경쓰이게 되었다. 

  제대 후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갔다. 대학원을 진학한 이유는 처음에는 예전부터 꿈꿔오던 "전문직 선교사"를 이루기 위해서였다. 아무래도 학위가 있으면 사역하는데 보다 이로울것 같았다. 그런데 이 또한 내 생각인지 솔직히 말하면 대학원 생활도 실패하였다. 관계의 실패였다 나를 찾는 사람들 틈에서 허덕이다가 벌써 졸업학기가 되었다.

  22세 이후의 나의 삶은 거의 실패의 연속이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졌고 요즘은 그간 열정을 갖던 많은 분야에 의욕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기도한다. 이러한 수 많은 실패도 결국엔 어느 한 때 아름다울 그날을 위한 훈련임을 믿으며... 그렇게 기도할 때면 여전히 주님은 나를 위로 해 주신다. 한결같음으로...

 제목은 거창하게 내가 예수를 그리스도라 시인하는 이유이지만 결국에는 내인생을 돌아보는 글인 것 같다. 여튼 내가 예수를 주라 시인하는 이유를 말함에 있어 내 일대기를 주욱 적어본것은 간략하게 적은 내 삶이었지만 이러한 삶속에서 내가 예수를 직접 경험해 보았기 때문이며 믿지 않는 분들이 혹시라도 내 삶을 통해 예수님께서 함께하신 작은 흔적이라도 찾길 바라는 마음에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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